세계 문화 유산

세계문화유산(424)- 스페인- 루고의 로마 시대 성벽

영동 2019. 6. 10. 05:29

    

세계문화유산(424)/ 스페인


루고의 로마 시대 성벽(Roman Walls of Lugo; 2000)



 



 



 



 



 



 



 



 



 



 



 



 



 

   갈리시아 자치 지방[Autonomous Community of Galicia], 루고 주[Province of Lugo]에 속하는 루고의 로마 시대 성벽은 3세기 후반 로마 시대 도시인 루쿠스(Lucus)를 방어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성벽 전체가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어 있으며, 서유럽에 세운 후기 로마 시대 요새의 훌륭한 사례이다.


   루고의 로마 시대 성벽은 인류 역사에 매우 중요한 여러 시기를 보여 주는 구조물?건축물이며, 놀라운 고고학적 사례이다. 로마 시대에 처음 축조한 당시부터 시작해 문제가 있었던 중세 시대를 지나 혁신적이고 혼란스러웠던 19세기에 이르는 여러 시대가 루고라는 하나의 건축 기념물에 융합되어 있다. 루고는 그 자체가 역사와 예술의 앙상블로서 루쿠스 아우구스티(Lucus Augusti)에서 기원했고, 2㎞에 이르는 그 자체가 도시 발전의 다양한 측면을 대변하는 증거물이다. 도시인 루쿠스 아우구스티를 창건한 것은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이 지역에 평화를 확보한 후인 기원전 15년과 기원전 13년 사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Lug’라는 켈트 어에서 파생된 도시 이름으로 비추어 보아 코포리(Copori)의 성지였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발굴 조사에서 이에 관한 증거가 출토된 적은 없다. 아우구스투스가 원정 중에 이곳에 로마군 병영을 설치했고, 옛 방식에 따라 바둑판 형태로 새로운 도시를 창건했다. 팍스로마나(Pax Romana)는 지역 전체가 줄곧 군사 주둔지였지만 작은 요새가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었다. 팍스로마나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있었기에 방어벽으로 돌러 쌀 필요 없이 바둑판 모양의 도시 설계에 따라 건설하였다. 이 마을은 풍부한 광물자원 덕분에 이후 몇 세기 동안 번성할 수 있었다. 주변 지역의 행정 중심지[콘벤투스 루리디쿠스 루센세(Conventus Iuridicus Lucense)]로서 로마인이 건설한 도로망의 중요한 교차점에 있었기에 그로 인한 이점을 누렸으며, 웅장한 공공건물과 호화로운 도시 저택들이 넓은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다. 그러나 2세기 중반에 프랑크 인[Frankish]과 알라만 인[Alemannic]이 변경의 요새 지대를 넘어 골(Gaul) 지방을 약탈하고 이스파니아(Hispania)로 침투해 들어왔다가 축출되었다. 그 결과 서로마의 도시를 에워싸는 거대한 방어벽들이 건설되었고, 263~276년에 루쿠스의 성벽이 완공되었다. 아마도 라인(Rhine) 강 너머에 있는 야만족의 침략에 대비해서라기보다는 로마 인이 자기네 영토를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지역 토착 부족에 대항하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식민 도시 대다수가 그러하듯이 루쿠스 역시 성벽으로 둘러싼 지역은 도시 정착지보다 면적이 좁았다. 또한 도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남동쪽은 성벽 바깥에 있었다. 5세기 초에 수에비(Suevi) 인이 이베리아 반도를 휩쓸었을 때 루고는 견고한 요새였는 데도 그들에게 저항하지 못했고, 마을은 화재로 파괴되었다. 457년 서고트 인은 수에비 인을 축출하고 마을을 함락하여 이곳에 정착했다. 무어 인이 714년에 스페인을 침략했을 때 루고는 다시 점령과 약탈을 당했지만 755년에 아스투리아스(Asturias) 왕국의 알폰소 1세(Alfonso I)가 탈환에 성공해 다시 기독교 영토가 되었다. 오다리우스(Odarius) 주교의 주도로 복원되었다. 그러나 지중해[Mediterranean]로 진군하던 노르만 인에 의해 968년에 또 파괴된 루고는 다음 세기까지 복구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루고의 로마 시대 성벽은 내벽과 외벽의 밖은 돌로 만들어졌는데 그 안은 흙이나 돌, 허문 건물의 잔해들로 채웠다. 성문은 총 10개인데 그 중 5개는 고대에, 나머지 5개는 최근에 세웠다. 5개의 계단과 진입 경사로를 지나면 난간 통로로 이어진다. 난간 통로에서 탑으로 가려면 두꺼운 성벽 안에서 발견된 여러 개의 이중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아마도 이와 유사한 계단을 탑마다 설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간 탑은 총 46기가 현재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으며, 39기는 거의 혹은 일부가 파손되었다. 탑은 성벽을 따라 설치했는데 간격이 일정하지 않다. 2층 구조이며, 대다수가 반원 형태를 하고 있다. 탑 사이의 간격은 너비 5.35m~12.80m까지 다양하다. 탑 몇 기는 조금씩 가늘어지는 절단된 원뿔 형태를 하고 있고, 몇 기는 장방형이다. 라 모체라(La Moschera)라고 불리는 이들 탑 중에 하나는 아치형 유리창이 2개인 상부 구조의 유물이 남아 있다. 구조물 전체는 물론이고 성벽에서도 여러 가지 다양한 자재를 관찰할 수 있다. 가장 많이 사용한 돌은 마감한 화강암, 그리고 특히 판암이다. 돌을 쌓은 형태와 돌의 크기는 비교적 다양하다. 화강암으로 쌓은 기반 위에 슬레이트로 벽을 세운 것도 있고, 기단부까지 슬레이트를 사용한 것도 있다. 성벽 쌓기에 흔히 이용한 또 하나의 공법은 하반부 혹은 아래로부터 ⅔ 지점까지 화강암을 쌓아 마감하고 상단 나머지 부분에 슬레이트를 쌓되 사이사이에 화강암을 끼워 넣는 방식이었다. 난간에는 총안(銃眼)이 있는데 이는 로마 시대 이후의 시설이 분명하다. 오늘날 레둑토 데 산타 크리스티나(Reducto de Santa Cristina)라고 부르는 구역을 1836~1837년에 대대적으로 재건축함으로써 당시 군사 시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새가 축조되었다. 원래의 성문들은 3세기 이후에 수차례 개축했다. 현재까지 가장 잘 보존된 성문으로는 팔사(Falsa) 성문과 미냐(Mina) 성문을 들 수 있다. 두 기의 탑 사이에 걸친 둥근 천장의 아치는 로마 시대 건축의 특징인데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은 사라진 초병 숙소의 흔적을 성벽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산 페드로(San Pedro) 성문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