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289)/ 독일 트리어 로마 유적, 성 베드로 성당과 성모 마리아 성당(Roman Monuments, Cathedral of St Peter and Church of Our Lady in Trier; 1986) 트리어는 모젤(Moselle) 강 연안의 라인란트팔츠(Rheinland-Pfalz) 주에 속하며, 1세기부터 로마의 식민지였고, 그 다음 세기부터는 대규모 무역 중심지였다. 3세기 말엽 사분 통치[Tetrarchy] 시기에는 로마 제국의 수도 중 하나가 되어 ‘제2의 로마’로 알려졌다. 현재까지 유적이 많이 남아 있어서 로마 문명을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다. 트리어는 로마 제국 분할 이후의 대규모 로마 수도이다. 팔라틴 홀[Aula Palatina], 제국 목욕탕[Imperial Thermae]과 더불어 황제 궁전 유적은 커다란 규모가 특징이다. 트리어에 밀집한 수준 높은 유적은 로마 문명을 잘 보여주는데 교량?요새화된 성벽 유적?공중목욕탕?원형 극장?창고 등의 유적이 있다. 특히 이 도시에서는 장례 예술과 도기 제조술, 유리 세공술, 화폐 주조술 등이 번성하였다. 트리어는 ‘제2의 로마’로 불리기도 했으나 이 명칭에 대한 공식적인 권리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286년에 제국을 분할하고, 7년 뒤 사분 통치 방식을 도입한 이후에야 획득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이 로마 도시는 번성하였다. 이 식민지 도시의 최초 중심지를 이루는 일반적인 집단 주택은 대부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통치 시기(41~54)에 건설되었으며, 2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크게 확장하여 성벽을 건설하였다. 성벽은 남쪽으로는 산업 지역과 근처의 목욕탕을 포함하였고, 동쪽으로는 동서 대로를 넘어서 확장된 원형 극장과 경마장을 포함하였다. 또 모젤 강 위로는 사암과 현무암으로 다리를 건설하고, 동서대로를 서쪽으로 확장하였다. 이 동서대로는 이전에 지은 도로를 교체한 것으로 이전 도로의 토대도 발굴되었다. 258년과 268년 사이에 포스투무스가 국경에서 프랑크 족과 알라마니 족이 위협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이곳에 주둔하였는데 이때 트리어가 최초로 수도가 되었다. 293년 로마가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지배하기 시작한 이래, 브르타뉴(Brittany)와 골(Gaul)의 통치자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이곳으로 이동해 왔고, 트리어는 수도로서 위치를 더욱 굳혔다. 이 도시는 ‘트레베리스(Treveris)’로 이름이 바뀐 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06년 이후 대규모 도시로 재건하였다. 복원된 원형 극장과 공중목욕탕, 원형 대경기장, 몇몇 집단 주택을 철거하고 건설한 거대한 궁전 유적은 사분 통치로 형성된 새로운 균형에 근거하여 의도적인 정치적 선택을 반영한 것이다. 트리어는 인류 역사의 주요 사건과 직접적?실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312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는 막센티우스를 치기 위하여 진격하였는데 이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적 종교로 인정한 밀라노 칙령(313)의 전주가 되었다. 326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집권 20년을 기념하려고 트리어에 바실리카 풍 교회당을 2개 건설하였는데 이 건물은 현재 대성당과 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남아 있다. 337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망한 뒤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가, 그 다음에는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와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트리어에서 거주하였다. 트리어는 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골 지방의 주도이기도 하였다. 이 도시의 행정 구역은 게르만 국경에서 대서양까지, 하드리아누스 방벽에서 모리타니(Mauritania)의 탕헤르(Tanger)까지 넓게 걸쳐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재위 기간에 기독교가 확산된 데에서 트리어 최초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고트 족의 침략은 트리어의 쇠퇴를 불러왔다. 그 뒤 로마 제국의 수도는 골 지방 아를의 수도인 밀라노로 옮겨졌다. 그러나 트리어의 변화는 그대로 역사가 되어 이어졌다. 이 도시의 배치는 아직도 2세기 형태를 유지하는데 동서대로[다리]와 남북대로[Simeonstrasse]가 주요 간선 도로 역할을 한다. 오랫동안 주요 기념물들은 건축 당시의 목적대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방문객을 만났던 팔라틴 홀은 프랑크 귀족의 궁전이 되었다. 1200년경에는 선제후였던 트리어 주교들의 소유가 되어 1615~1647년에 이 큰 홀이 주교 궁전의 일부로 사용되었다. 검은 문[Porta Nigra]으로 알려진 로마 시대 성문도 그대로 유지되어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다. 다른 건물들은 형태는 변했으나 용도 면에서는 변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두 바실리카 풍 교회당은 11세기와 13세기에 거의 완전히 재건되었으며, 초기의 종교적 중심지 역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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