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문화 유산

[스크랩] 세계문화유산(279)네덜란드- 베임스터르 간척지

영동 2019. 1. 16. 05:11


세계문화유산(279)/ 네덜란드

 

베임스터르 간척지(Droogmakerij de Beemster; 1999)

 

 

 

 

 

 

 

 

 

 

 

 

 

 

 

 

   17세기에 만들어진 베임스터르 간척지는 노르트홀란트 주(Noord-Holland)에 위치하며, 네덜란드 개간지를 대표하는 매우 특별한 사례이다. 고전주의와 르네상스식 설계 원칙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배치된 들판과 도로, 운하, 제방, 촌락이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다.

   베임스터르 간척지의 혁신적이고도 지적이며 창의적인 경관은 유럽은 물론 다른 지역의 간척 사업에도 심대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베임스터르 간척지의 조성은 사회·경제적 팽창이 이루어지던 결정적 시기에 인류와 물 사이의 상호 관계에서 일대 진전을 의미한다. 석호와 삼각주는 네덜란드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매립과 물에 대한 보호 체계를 강구하면서 이 땅들은 수세기에 걸쳐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토지로 변모하여 왔다. 현재 총면적 3,400,000㏊인 네덜란드 영토 중 ⅓이 해수면보다 낮다. 만약 제방을 건설하지 않고 넘치는 물을 배수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국토의 65%가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을 것이다. 콥반노르트홀란트(Kop van Noord-Holland)의 북쪽 해안 지역, 바덴(Wadden) 해와 만나는 이 해안은 한때 덴마크의 남서부 지방에까지 연결된 갯벌이었다. 초기 거주지는 둔덕 위에 있었는데 방조벽과 제방이 건설되기 이전에는 둔덕이 물의 침입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였다. 계속되는 범람과 그에 따른 피해 때문에 새로운 땅을 ‘조성’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는데 더불어 훌륭한 농토까지 생긴다면 더욱 좋은 일이었다. 투자 자본의 이용 가능성, 안정적인 정치 경제적 관계, 기술 수단의 이용 가능성, 기업가 정신, 그리고 농업용 토지의 유리한 가격 등 다섯 가지 요소가 간척 사업의 진행에 영향을 미쳤다. 물과의 싸움은 노르트홀란트 주 북부의 침수 지대였던 ‘에이(IJ; 네덜란드의 북부)’ 강 하구의 위쪽 지역에서 해수를 차단하면서 시작되었다. 16세기부터 시작된 이러한 노력은 이후에는 좀 더 내륙에 있는 호수와 못의 물을 배수하려는 방향으로 계속되었다. 간척 사업은 규모가 큰 홀란트 북부의 호수들을 배수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수차를 움직이는 풍차를 이용한 양수와 배수 기술의 급진적인 발전 덕분이다. 중세 말부터 에이 강의 북쪽 전체가 열을 지어 빙 둘러선 제방으로 에워 쌓였다. 하지만 각각의 간척지에는 여전히 상당한 면적에 걸쳐 물이 남아 있었고, 이 지역의 가운데 부분은 아직까지 세르머르(Schermer), 퓌르머르(Purmer), 베임스터르와 같은 커다란 호수가 차지하고 있다. 배수 장치[수문]를 갖춘 제방 축조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더욱 넓은 땅을 간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17세기와 18세기의 ‘삼각주 공사[delta-works]’라고 불리기도 했다. 간척지의 배수에 풍력을 이용한 것은 15세기로, 바람을 동력으로 사용하는 양수용 수차를 이용하기 시작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풍차에 부착하는 회전 캡의 개발로 좀 더 규모가 큰 호수의 물을 빼내는 것이 가능해졌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3, 4기의 풍차를 연결하여 이용함으로써 베임스터르와 같이 규모가 큰 호수의 물을 다량 배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공정의 개발은 시몬 스테빈(Simon Stevin; 1548~1620)의 기여에 힘입은 바 크다. 암스테르담에서 온 여러 명의 부유한 레헨트(regent; 자금력을 갖춘 신흥 시민 계층)와 상인, 헤이그에서 활동하는 다수의 고위 관료가 베임스터르 배수 사업을 주도하였다. 1607년, 홀란트 정부는 필요한 자본을 구할 수 있도록 ‘베임스터르 회사[Beemstercompagnie]’를 세운 16인에게 특허권을 인정해주었다. 이 특허에는 ‘물을 땅으로 바꿀 수 있는 공사’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투자자의 수는 모두 123명이었고, 1612년 간척지가 완성되었을 때 그들은 각자의 투자에 대해 17%의 수익금을 받았다. 알크마르(Alkmaar) 출신의 측량사 피터 코르넬리스 코르트(Pieter Cornelisz. Cort)가 공사에 앞선 예비 작업으로, 제방을 쌓고 베임스터르와 그 주변 환경을 지도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이후 공사의 가능성을 예측하고 베임스터르의 자체적 배수 방법을 도모하였다. 1608년 코르트가 사망한 후, 암스테르담에서 온 측량사 루카스 얀스 신크(Lucas Jansz. Sinck)가 그의 자리를 대신하여 베임스터르 간척지를 위한 첫 번째 제방 구역을 설계하였다. 1608년 자위더르(Zuyder) 해로 통하는 배수 운하와 함께, 퓌르머렌트(Purmerend)에서 네크(Neck)에 이르는 제방 구역 공사의 하청을 마쳤다. 1611년, 도로와 운하의 설계를 신크에게 의뢰하기로 결정하고, 같은 해에 토지 구획에 대비하여 운하와 도로의 배치를 시작하였다. 배분된 토지 안에서 그 소유주들은 스스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충분히 많은 수의 운하와 도랑을 팔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도로 사이에 놓인 블록의 표면적이 400모르겐(morgen; 1모르겐=약 0.85㏊)이 되고, 각 블록이 운하에 의해 100모르겐 면적의 블록 4개로 소분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가, 마지막에는 땅을 5개의 필지로 세분하기로 결정하였다. 땅의 배분은 ‘묶음[packages]’으로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각 묶음의 가치가 균일하도록 설정하여 양분이 없는 거친 땅은 기름진 땅으로 보상받을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기초 공사에는 삽과 곡괭이를 이용하였고, 수문과 풍차의 골조는 30~40명이 함께 작업하는 수동 말뚝 박기 설비를 이용하여 세웠다. 간척 사업은 풍차를 이용한 덕분에 실현될 수 있었으며, 베임스터르 간척은 15기의 풍차 망(網)을 완성했기에 가능하였다. 간척지는 1612년 5월 19일 마침내 현실이 되고, 새로 생긴 토지를 배분하였다. 1616년 조례는 ‘조림(造林)’에 관한 조건을 포함하고 있다. 그에 따라 길가에 나무들을 줄지어 심었고 1620년부터 ‘이상적인’ 풍경이 조성되었다. 처음에는 길의 북쪽과 서쪽에만 나무를 심었는데 그 이유는 여전히 물기를 잔뜩 머금은 도로를 햇볕으로 건조시키려는 것이었다. 1800년대에 풍력을 대신하여 증기력을 이용한 배수 방법으로 전환된 후에는 세 곳의 양수장을 통하여 물이 벨트 운하[belt canal]로 빠져 나갔다. 그러다 20세기에 들어서는 동력은 다시 디젤 엔진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베스트데이크[Westdijk; 미덴스루트(Middensloot)]의 바우터르 슬라위스(Wouter Sluis) 전자동 전기 양수장과 오스트데이크[Oostdijk; 오스트하위제르스루트(Oosthuizersloot)]의 야코뷔스바우만(Jacobus Bouman) 디젤 엔진 양수장을 통해 배수가 이루어진다





출처 : 돌아가는 인생
글쓴이 : 우영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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