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문화 유산

세계문화유산(208)- 영국- 스터들리 왕립 공원과 파운틴스 수도원 유적

영동 2018. 12. 27. 06:35

세계문화유산(208)/ 영국

 

스터들리 왕립 공원과 파운틴스 수도원 유적

(Studley Royal Park including the Ruins of Fountains Abbey; 1986)

 

 

 

 

 

 

 

 

 

 

 

 

 

 

 

 

 

 

 

 

 

 

 

 

 

 

 

 

   잉글랜드 노스요크셔 주(North Yorkshire)에 있는 시토 수도회의 파운틴스 수도원(Fountains Abbey) 및 파운틴스 홀 성(Fountains Hall Castle)과 주변 유적에는 훌륭한 경관이 조성되어 있다. 스터들리 왕립 공원에 있는 신 고딕 양식의 성, 18세기 경관, 정원 및 운하, 19세기 농장 및 가로수길 등으로 인해 이곳은 훌륭한 유적지로 꼽힌다.

  파운틴 유적의 독창성과 놀라운 아름다움은 영국의 가장 큰 중세 유적인 시토 수도원 주위에 훌륭한 가치를 지닌 인공 경관이 구성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당시 시토 수도회는 잉글랜드에서 확장 여세에 있었다. 수도원 유적에서 중요한 요소들은 작은 파운틴스 홀 성, 18세기 존 아이슬래비(John Aislabie)가 만든 조경, 정원 및 운하, 19세기 농장 및 가로수 길 그리고 스터들리 왕립 교회이다. 파운틴스 수도원은 성 베네딕트의 가르침을 더 가까이 하고자 하며 이상적인 삶을 추구했던 요크 세인트 메리[St Mary's of York]의 수도사 13명에 의해 1132년에 설립되었다. 1133년에 파운틴스 수도원은 클레르보(Clairvaux) 수도원의 지부로 알려졌다. 시작부터 수도원에는 헌금이 많이 모여 13세기에는 토지 재산이 크게 늘어났다. 1530년 이후 수도원 공동체가 해체되었을 때 파운틴스 수도원은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수도원이었다. 4세기 동안 번영을 누린 흔적은 영국에서 가장 큰 수도원 건물 유적 규모에서 볼 수 있다. 수도원은 12세기부터 16세기까지 계속 건설되었지만 헨리 8세가 폐쇄시켰다. 부르고뉴 형식과 결합하여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는 수도원 교회의 네이브(nave)는 검소한 시토 수도회의 초기의 이상을 보여준다. 남쪽에 무리를 지어 있는 부유한 수도원 건물은 토지 재산과 정신적인 영향으로 인해 설립 당시의 이상에서 멀어진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고질적인 변화를 증명하고 있다. 수도원 주변, 동쪽에는 사제단 회의장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사제단 회의장은 수직으로 이어지는 회랑과 이어져 있고, 예배실이 트랜셉트(transept)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남쪽으로는 수도원 식당이 있다. 수도원 식당은 역시 회랑과 수직으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고, 식당 측면에 난방장치를 한 방과 부엌이 있다. 서쪽에는 커다란 저장실이 있다. 이 저장실은 아직도 남아 있으며 평수사의 식당이 있다. 본래는 동쪽 건물의 위층에 있었던 수도사들의 숙소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모든 부속 건물들은 시토회 수도원을 구성하는 특징적인 구조물 근처에 추가로 지은 것이다. 특징적인 본래 구조에는 평수사 의무실, 다양한 구역으로 나 있는 긴 복도, 숙소, 감옥, 영안실, 수도사 휴게실과 분리된 부엌, 저장실, 예배당이 있다. 본관 근처에 또한 수도원의 방앗간, 빵집 그리고 맥아 저장고의 유적을 볼 수 있다. 스터들리 왕립 공원에 있는 세인트메리 교회는 빅토리아 시대 신고딕 양식의 전형이며, 파운틴스 수도원에서 북쪽으로 1㎞ 떨어진 곳에 있다. 리펀(Ripon)의 후작과 후작 부인을 위하여 1871~1878년에 지어진 성공회 교회는 윌리엄 버제스가 건축한 종교 건축물의 걸작이다. 교회에는 빅토리아 영국-가톨릭의 종교적 정조의 특징인 화려한 내부 장식이 있다. 1859년에 재산을 물려받은 후작은 성공한 정치가로서 1880~1884년에는 인도의 총독을 지냈다. 신앙심이 깊었던 후작은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을 싫어했으며, 중세에 보았던 좀 더 인도주의적인 배려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었다. 존 아이슬래비는 1693년에 스터들리의 부동산을 상속했다. 사회적?정치적으로 야심이 있던 그는 1695년 최초로 리펀 의회의 토리당원이 되었고 1718년에는 재무부 장관이 되었다. 아이슬래비는 요크셔로 돌아와 1718년에 시작했던 정원 만드는 일에 몰두하였다. 1742년 아이슬래비가 죽자 그의 아들 윌리엄은 수도원 유적을 사들였다. 그는 그림 같은 낭만주의 양식으로 조경 지역을 확장하여 아버지가 작업한 이전 모습과 대조를 이루었다. 논의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18세기의 가장 중요한 수상 정원을 두 사람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다. 정원과 공원은 대대적인 개조를 피해서 아이슬래비의 후예인 바이너 가문[Vyner family]에 넘어갔다. 공원은 1966년에 웨스트 라이딩 카운디 의회[West Riding County Council]에서 사들였고, 1983년에는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가 구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