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258)/ 프랑스
보르도, 달의 항구(Bordeaux, Port of the Moon; 2007) 보르도는 아키텐 주[Region of Aquitaine] 지롱드 현[Department of Gironde]에 위치한 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항구 도시로 지형이 초승달 모양으로 하고 있어 ‘달의 항구[Port of the Moon]’라고 불린다. 보르도는 주민들이 살고 있는 역사 도시로 도시와 건축에 있어 특별한 유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보르도는 2,000년 넘게 유럽의 문화적 가치가 교류하는 장소로서 역사적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특히 12세기 이후에는 영국과 저지대 국가들[네덜란드 등]의 무역 중심지로 번성하였고 계몽주의 시대에는 국제도시로 발전하였다. 18세기 초 이후부터 20세기 초까지 보르도는 프랑스 내에서는 파리를 제외하고 다른 어떤 도시보다 많은 건축물이 건설되었다. 보르도는 18세기의 고전주의와 신고전주의 건축물과 도시 계획이 통일성?일관성 있게 보존되어 있다. 보르도는 도시를 인본주의?보편주의?문화의 용광로로 만들고 싶었던 ‘철학자들의 성공(success of philosophers)’을 상징하는 곳이다. 보르도의 기원은 기원전 3세기 즉 뤼테스(Lutece; 파리의 옛 이름)가 설립된 시대로 본다. 보르도의 옛 이름은 ‘부르디갈라’(Burdigala)로 비튀리즈(Bituriges)의 셀트 족이 건설하였다. 초기 시대를 증명하는 고고학적 유적 또는 유물은 별로 많지 않지만 청동기시대였던 기원전 10세기 초반부터 이미 사람들은 영국[그레이트 브리튼 섬]으로부터 주석을 수입하여 온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56년 로마시대 이후로 부르디갈라는 항구[지금의 보르도 항]를 중심으로 한 상업 도시로 성장하였고, 이후 여러 세기 동안 항구 도시로서의 기능을 유지하였다. 이미 286년에 보르도에는 대학이 하나 있었다. 중세 초, 보르도는 반달 족?위지고트 족?프랑크 족 등에게 여러 차례 침략을 받았다. 8세기 무렵 보르도는 카롤링거 왕족에 의해 정복당했다. 이 시기에 ‘세갱(Seguin)’이란 이름이 등장한다. 그는 최초의 카롤링거 가문의 보르도 자작으로 왕에 의해 작위를 받았다. 848년, 도시는 노르만 족에 의해 파괴되었고 주민들이 몰살당했다. 아키텐 공작이자 푸아티에 자작인 알리에노르(Alienor)와 노르망디?앙주?멘?투렌의 공작인 앙리 플랑타주네(Plantagenet)의 연합의 결과 1154년부터 3세기 동안 보르도는 영국에 복속되었다. 1214년 보르도의 부르주아들은 그들이 생산하는 포도주에 대한 세금을 면제받았다. 13세기 보르도는 도시로서 기능하는 데 필요한 최초의 공공 기관들을 건립하기 시작했고, 1253년에 이르러 보르도는 시로 승격했다. 14세기 보르도는 아주 넒은 지역을 관장하는 수도이자 정치적 중심지였다. 15세기 영국과 프랑스 간의 충돌 때, 보르도는 프랑스 인들에 맞서 싸워야 했다. 그러나 1453년 프랑스 왕 샤를 12세가 이끄는 프랑스 군에 의해 점령당하고 만다. 이후 몇 세기 동안, 보르도는 영국이라는 중요한 시장을 잃게 됨으로써 경제가 약화되었다. 16세기와 17세기, 경제가 다시 살아나지만 왕의 폭정으로 시민권은 점차적으로 약화되고, 이는 왕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 18세기, 보르도에는 여러 중요한 공공기관들이 자리 잡았다. 의회?군사 정부?행정부?대학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로써 보르도는 도시로서 필요한 요소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 1705년 상업회의소가 설립되었고, 1712년 학술?문학?예술 아카데미가 설립되었다. 이는 경제 부흥과 지적 쇄신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였다. 프랑스 혁명기를 비롯하여 보르도는 그 뒤 수십 년간 격동의 정치 변천사를 겪었다. 19세기 말, 보르도는 대도시가 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프랑스의 군사 기지 중 하나였다. 보르도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0~1944년까지 독일에 점령당했으나 직접적인 심각한 피해는 입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