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문화 유산

[스크랩] 세계문화유산(274)- 네덜란드- 쇼클란트와 그 주변 지역

영동 2019. 1. 11. 05:31


세계문화유산(274)/ 네덜란드

쇼클란트와 그 주변 지역(Schokland and Surroundings; 1995)

 

 

 

 

 

 

 

 

플레보란트 주(Province of Flevoland) 노르트오스트폴더(Noordoostpolder)에 속하는 쇼클란트(Schokland)는 원래 반도(半島)였다가 15세기쯤에는 섬이 되었다. 바다의 침식 작용으로 유인도와 무인도를 거듭하다가 1859년에는 주민을 모두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자위더르 해[Zuider zee]를 간척한 1940년대부터는 육지에 포함되었다. 쇼클란트는 선사시대에 인간이 거주한 흔적이 있는 곳이며, 바다의 침식 작용에 적응하고 맞서온 네덜란드 인의 영웅적인 모습을 상징하는 곳이다.

쇼클란트와 그 주변 지역은 갯벌의 간척과 이용이라는 측면에서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전형적인 습지대 이용 형태를 보여 주는 탁월한 사례다. 넓은 육지가 사라진 것은 이런 습지대의 이용과 간척 작업 때문이었다. 또 자위더르 해가 만들어진 것은 이런 역사적인 작업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쇼클란트는 예전에 더 넓은 지역을 이용했음을 보여 주는 마지막 흔적이다. 이 좁은 지역에 남아 있는 정착지, 공동묘지, 거주지, 제방, 토지 구획 제도 등을 보면 더 넓은 지역을 이용한 역사를 알 수 있다. 계속되는 농업 기계화와 추가적인 배수 작업[간척 작업]이 문화유산과 생물 유산에 지속적으로 위협 요소가 되고 있다. 이 지역의 지형은 오베르에이셀세 페흐트(Overijsselsche Vecht) 강과 그 지류의 지하 수로를 포함하여 모래, 빙하 퇴적물의 표력 점토층(漂礫粘土層), 홍적세의 강 사구(砂丘), 충적세의 퇴적층 등으로 이루어졌다. 홍적세 이후의 해수면 상승 때문에 토탄층이 계속 형성되었고 이에 상응하여 토양 표면의 모래층은 줄어들었다. 고고학적 발굴로 밝힌 대로 이 지역에 처음 인간이 살게 된 시기는 수렵?채집인이 들어온 구석기시대 말(약 10,000년 전)로 거슬러 올라간다. 뒤이은 중석기시대에는 그 수가 더 많이 늘어난다.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초기(약 4,200~1,800년 전)의 정착지, 공동묘지, 농사의 흔적을 보면 섬을 항구적으로 이용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용하지 못했는데 해수면 상승으로 해침(海浸)을 당하여 거주자들이 이 지역을 떠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 정착 흔적이 거의 없었다. 1000년경 쇼클란트 주변의 갯벌에서 물이 빠지기 시작하여 알미레의 담수호로 흘러 들어갔다. 도자기 유물을 보면 1300년 무렵에는 섬이 완전히 말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갯벌의 배수와 토지 경작은 갯벌 층을 산화시키고 줄어들게 하여 지표면이 점점 가라앉아 습지대가 되게 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배수 지역에서 계속 물을 빼기 위한 작고 낮은 제방을 쌓았다. 가장 바깥 쪽 제방이 만들어진 시기는 12세기 말이었다. 13세기 초 알미레(Almere) 지역이 바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당시 쇼클란트는 남동쪽으로 뻗은 갯벌[토탄] 능선을 따라 본토와 연결된 간척지였다. 그러다 12세기에 섬이 된 인근의 우르크(Urk)처럼 1450년경 능선이 솟아오르면서 섬이 되었다. 거주지와 제방의 분포를 보면 1170년 기록된 것과 같은 폭풍우가 치는 동안 땅이 많이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섬 동쪽에 있던 넓은 거주지가 1400년 무렵 버려졌고, 오우트 에멜로르트(Oud Emmeloord)?미델부르트(Middelbuurt)?자위더르트(Zuidert)에 새로운 거주지가 만들어졌다. 이와 함께 사회의 경제적 기반이 농업에서 어업으로 바뀌었다. 또 알미레도 자위더르 해가 되었다. 바다와의 투쟁은 몇 백 년 동안 계속되는 동안 육지 손실도 끊이지 않아서 섬의 서쪽과 북쪽에서 손실이 많았다. 땅을 보존하는 일은 지역 주민들이 떠맡기에는 부담이 너무 큰일이었다. 자위트푼트(Zuidpunt)의 등대가 중요하다는 이유로 오베르에이셀 지방 의회가 선박세로 재정 지원을 했을 뿐이다. 1710년 홀란트(Holland) 주와 프리슬란트(Friesland) 주가 이 등대가 있는 해상 운송 노선에 경제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에 추가로 재정 지원을 하였다. 당시 세계적으로 큰 항구였던 암스테르담이 1660년에 우르크와 에멜로르트(Emmeloord)의 소유권을 얻고 이 지역의 보존 책임을 맡았다. 이 시기에 섬에 있던 거주지 네 곳을 진흙, 거름, 갈대, 해초 등을 사용하여 높이고 넓혔다. 섬이 남아 있는 부분은 습한 목초지가 되었다. 이 모든 조치에도 제방과 호안[revetments]은 19세기에 일어난 침식 작용을 더는 막아내지 못하였다. 섬 전체를 보호하기 위해 1804년에 축조하기 시작한 석조 제방은 제방을 쌓은 지반의 침식과 폭풍우에다 유빙이 정기적으로 제방의 일부를 무너뜨렸기 때문에 지속적인 보호 시설이 되기에는 너무 약했다. 에멜로르트?미델부르트?자위더르트에 남아 있던 주민들이 어업으로 버는 수입이 계속 줄어들자 1859년, 당국은 섬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미델부르트에 있던 교회를 포함하여 건물 몇 동이 파괴되지 않고 남아 100년 동안 해안 방어 시설로 사용되었다. 쇼클란트 섬은 오베르에이셀(Overijssel) 해안을 보호하는 방파제와 선박의 피난처 역할을 하였다. 1918년 간척을 규제하려고 ‘자위더르 해 법[Zuyder Zee Act]’을 비롯한 다른 법률 3개가 통과된 후 쇼클란트가 있는 노르트오스트폴더(Noordoostpolder)가 두 번째로 간척되었다. 1940년 12월에 제방 공사를 모두 끝내고, 1942년에 간척지 배수를 완료하였다. 500년 동안 섬이었던 쇼클란트는 이 시대 최대의 문화적 경관을 자랑하는 에이셀미어폴더스(IJsselmeerpolders)의 일부가 되었다





출처 : 돌아가는 인생
글쓴이 : 우영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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