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의 족적을 살펴보기 전에 그의 조상들인 이성계 계보를 알아야 한다.
사실, 이성계는 고려의 권문세족들이 보기에는 안중에도 없는 변방의 촌놈 출신이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성계 선조 중 한사람이 전주에서 살았는데 당시 전주 관아의 기생과 눈이 맞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기생이 전주 수령이 아끼던 애라 둘이 강원도 쪽으로 야반도주를 했다. 하필 그 전주 수령이 이성계 할아버지가 강원도 숨어사는 지역으로 부임해 옴에 따라 다시 야반도주를 해서 여진족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금의 함경도 함흥땅에 자리를 잡는다.
이성계 선조가 지역 수령이 아끼는 기생과 눈이 맞아 도망칠 정도였다면 어느 정도 배짱과 신체도 강건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야성의 지역인 함흥에서 전주이씨는 무인집안으로 자리를 잡는다.
당시 이 지역은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원의 땅으로 만들어 놨다. 그리고 전주이씨들을 원의 관리로 임명하고 쌍성총관부를 돌보게 했다.
이성계의 이십대 때는 원-명 교체기의 혼란기로 동북방 지역은 원나라 선비 출신인 나하추 세력과 전주 이씨 세력인 이성계 아버지
이자춘(추존왕,환조)이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고 있었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원-명 교체기의 혼란기를 이용하여 원래 고려 땅인 이 지역을 수복하려 했다.
이에 이자춘은 아들 이성계와 함께 원에 땅을 뺏긴지 100년만에 쌍성총관부를 철폐하고 고려가 옛 영토를 회복하는데 큰도움을 준다.
이 일로 이자춘은 고려의 벼슬을 받고 이성계가 고려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이자춘과 이성계는 원이 쫓겨난 함경도 일대에서 고려왕조의 벼슬을 받고 충성하며 세력을 키워 간다.
당시 고려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해지자 고려조정은 뛰어난 병력을 보유한 이자춘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에 이자춘은 자기 대신 25세에 이른 아들 이성계를 보낸다.
25세까지 고향을 떠나본 적 없는 이성계는 처음으로 군대를 이끌고 함흥을 떠났다.
이성계 부대는 여진족, 몽골족 뒤섞여 살며 세력을 키운 지역 특성때문에 여러 인종이 혼합된 부대였다.
사실, 전통적인 고려 장수들이 지휘하는 고려인 부대의 입장에서 볼 때 이성계의 군대는 그야말로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외인부대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이성계는 아무리 전공을 세우더라도 출신성분 때문에 고려사회에서 높은 직에 오를 가능성이 없었고 십중팔구 중도에서 사라지고 말 청년장교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외인부대와 함께 평안도와 수도 개경은 물론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역까지 출병해 뛰어난 전과를 올린다.
이런 이성계를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는 데 바로 그가 최영이었다. 최영은 고려 권문세가 출신으로 당대 최고무장으로 고려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한미한 가문 출신 변방 촌놈 청년장교 이성계를 최영은 자식처럼 돌보면서 키워준다. 덕분에 이성계는 최영과 함께 왜구를 물리치며 고려무인으로 우뚝 서게 된다.
이성계가 타고난 무예와 지도력 그리고 최영의 뒷받침으로 고려 권문세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크게 성장을 한 후 개경까지 진출한다.
개경에 진출한 이성계는 자기의 한미한 가문을 보완하기 위해 고려 권문세가인 강씨 일족 출신인 강씨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이 강씨는 후에 세자 방석의 어머니 신덕왕후가 된다
이성계와 혼인한 강씨는 이성계보다 20살 가량 연하였으며, 당시 이성계는 첫 부인 한씨(韓氏)와의 사이에 6명 아들의 장성한 자녀들을 두고 있었다.
그 중 다섯째 가 태종 이방원이다.
제 1차 왕자의 난 비극이 싹트고 있었다.
이방원은 1367년(공민왕 16)에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방원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태조의 사랑을 받았다. 자라면서 유학 공부에도 심취해 문무를 겸비하였으며, 17세가 되던 1383년(우왕 9)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성계는 이방원의 과거 급제에 뛸뜻이 기뻐했다. 한미한 가문의 변방 촌놈이라는 꼬리 표를 떼고 고려의 중앙귀족으로 신분상승 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이때까지도 이성계는 고려의 귀족이 되는 것이 꿈이었지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건국하리라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나 이방원은 글만 읽는 유생이 아니었다. 이방원에게는 아버지를 따라 다니면서 스스로 익힌 무인의 기질과 그리고 이성계가 생각하지도 못한 더 큰 야망이 있었다.
이때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던 초라한 혁명가가 있었다.
바로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자기의 생각을 뒷받쳐 줄 무력 즉 군대가 필요했다. 최영이 적격이기는 했지만 그는 권문세가 출신의 당시로서는 기득권세력이었다. 그리고 그의 맹목적인 고려에 대한 충정은 정도전이 몇마디 말도 다 꺼내기 전에 목부터 달아날 형편이었다.
그래서 정도전이 찾아낸 게 바로 이성계였다. 정도전이 찾는 사람으로서 딱이었다. 한미한 가문에 고려에 별 충정도 없고 또 순진하고 순수하기까지 했다.
조선건국까지 살펴보면 이성계는 정도전의 말을 철처하게 따른다. 그리고 조선건국 이후에도 정도전이 하자는대로 거의 다 해준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관계는 칼과 붓의 만남으로 한 나라를 건국하고도 별 마찰이 없었던 참 아름다운 관계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관계를 산산히 부서버린 사나이가 이방원이었다.
이방원은 정도전을 아저씨라 부르며 스승으로 모시고 자랐다. 그래서 이방원이 정도전을 살해하고 왕이 되고 나서도 정도전의 개혁적인 정책은 많이 답습했다.
이방원의 야망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392년(공양왕 4)에 정적인 정몽주를 제거하면서 부터이다. 이성계가 함흥을 떠나 고려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할 때와 같은 나이 스물 다섯 살 때이다.
당시 정몽주는 신진사대부를 대표하는 유학자였다.
정몽주는 이성계 가장 존경하는 학자이자 친구였다.
정몽주는 이성계와 같은 친명파로서 위화도 회군을 지지하고 고려의 정치 개혁에도 동참했다. 그러나 역성혁명에는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반대를 넘어서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고 하기까지 했다.
정몽주 일파에 의해 이성계일파의 절체절명의 위기가 왔다.
이때 이방원에 의한 정몽주 암살이 일어나서 정세를 단번에 바꿔 버린다
이성계로서는 자기 아들 이방원의 정몽주 암살로 조선을 건국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정몽주 살해만은 도저히 받아 들이기 힘들었다.
당시 이성계는 자신을 지금의 위치까지 키워 준 아버지와 같은 최영을 죽인 것에 대해서도 심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인간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절친한 벗이자 존경하는 학자인 정몽주를 자신의 아들이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다는 명분으로 무참히 참살하자 엄청나게 분노했다.
사실 이부분에서 여러 설이 나올 수 있다.
이성계를 너무 미화한다는 말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역사 진행 상황을 보면 이성계가 정몽주 암살에 크게 분노한 것은 사실이고 그 이후 이방원이 이성계나 정도전으로부터 왕따 비슷하게 당한 것도 사실이니 맞는 이야기 일 것이다.
사실 역사 진행과정을 보면 이성계는 나라를 새로 세울 만큼 그리 큰 야망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순수한 무인에 가까운 성정이었던 거 같다.
이성계 자기 자신도 고려왕조를 뒤엎고 혁명을 일으키는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아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도전을 만나 어찌 어찌 오다보니까 여기까지가 오게된 자리였을 것이다.
이성계 입장에서 돌으켜 보면 고려왕조 왕씨 성을 가진 수 만 명을 참혹하게 말살하고 조선왕조를 창건했는데 이방원의 주도로 벌어진 골육상쟁으로 사랑하는 아들 둘을 잃고 그 반란을 끝내 버티지 못하고 왕위에서 물러나 함흥으로 떠나 온 이성계 말년의 비애와 분노, 고독과 회한은 어땠을까?
이방원은 이성계의 이런 감정은 아랑곳 없이 왕을 향한 그 계획을 착착 진행시켜 간다.
이방원이 진정한 야망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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