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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람의 일이란 얼마나 덧없고 무상한 것인가?
48 한번 생각해 보라,
많은 의사들이 병에 걸린 환자들을
눈살을 찌푸리며 굽어보았지만
그들은 결국 죽어 버렸으며,
많은 점성가들이 근엄한 어조로
남의 운명을 예언했지만
그들 역시 죽어버렸다.
죽음과 불멸에 대한 해답을 찾느라
전력을 다해 논쟁을 벌이던
철학자들도 모두 죽었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인 영웅과
장군들도 결국 무의미하게 죽어버렸다.
마치 자신은 결코 죽지 않을 신이나 되는 것처럼
사람들을 살리고 죽이는
권력을 무자비하게 휘두르던
폭군들, 헬리케 ?폼페이 ?헤르쿨라네움처럼
완전히 파괴된 도시와
그 밖의 수많은 도시들의 멸망.
또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헤아려 보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매장한 다음
그 사람 역시 죽고,
또 다른 사람이 그를 매장한다.
이 모두가 고작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니,
결국 사람의 일이란 얼마나 덧없고 무상한 것인가?
어제만 해도 한 방울의 점액에 불과했던 것이,
내일이면 한 줌의 재로 화하는 경로를 관찰해 보라.
우리는 지상에서의 이 덧없는 순간을
자연에 순응하며 보낸 다음,
순순히 휴식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저 무화과 열매가
자기를 낳고 길러 준 대 자연에
감사하며 떨어지듯이. -079
출처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AureliusAntoninus)지음 /유동범 옮김
≪후기≫ 유성 박한곤
우리는 살아가면서 왜 살아가야 하는가! 하고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물음은 목적의식을 갖기 위해서이다.
여정에 목적이 없다면 정신을 포기한 상태이다.
정신 차려도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은 판국에
정신을 포기한다면 물 위에 떠내려가는 낙엽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갖는 목적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불청객을 인간의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로마제국의 16대 황제는 황제라는 위상보다
인간의 내면 깊은 곳으로 시야를 돌려
삶과 죽음의 관계를 밀착 취재하여
명상록을 남겼으니,,
오늘 이 순간을 더없이 귀하게
대화와 사랑의 실천으로
처음이며 마지막 인연이 될
오직 대자연이 갖는 심연-深淵 속에
심고 넓혀 가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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