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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113)-파키스탄 탁실라 고고 유적

영동 2018. 10. 29. 06:18


세계문화유산(113)/ 파키스탄

탁실라 고고 유적(Taxila; 1980)

 

 

 

탁실라 고고 유적은 파키스탄의 라왈핀디 북서쪽으로 약 35㎞ 떨어진 유적지이다. 고대에 이곳은 3개의 큰 무역로의 교차점에 위치하여 크게 번영했다. 무역로 중 하나는 그리스 작가 메가스테네스가 '왕도'(王道)라고 표현한 동부 인도에서 오는 길이고, 또 하나는 서아시아에서 오는 길이며, 나머지는 카슈미르와 중앙아시아에서 오는 길이다. 이들 무역로의 중요성이 사라지면서 이 도시도 몰락했고, 5세기에 마침내 훈 족에 의해 파괴되었다.

역사; 탁실라는 인도와 그리스?로마 문헌에 언급된 것과 두 중국인 순례자 법현(法顯)과 현장(玄?) 법사의 기술을 통해 알려졌다. 문자 그대로는 '깎아지른 바위의 도시' 즉 '타크샤의 바위'라는 뜻을 가진 타크샤실라(그리스 저자에 의해 탁실라로 음역됨)는 힌두교 비슈누 신의 한 화신인 라마의 동생 바라타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R?m?ya?a)>에 기록되어 있다. 도시 이름은 바라타의 아들로 그 곳의 첫 번째 왕이었던 타크샤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전승에 의하면 자나메자야 왕이 뱀을 제물로 바치는 성대한 제사를 드릴 때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Mah?bh?rata)>를 처음으로 낭송했다고 한다. 왕은 이 서사시에 나오는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불교 문헌 특히 자타카는 이 도시를 간다라 왕국의 수도로서 또 학문의 대(大)중심지로 언급했다. 간다라(간다리)는 BC 5세기에 만들어진 아케메네스(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의 비문에 사트라피 즉 속주(屬州)로 적혀 있다. 따라서 간다라의 수도인 탁실라는 1세기 이상을 아케메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던 것이 분명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BC 326년 인도를 침략했을 때 탁실라의 지도자 암비(옴피스)는 이 도시를 넘겨주고 모든 것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처분에 맡겼다. 이 마케도니아 정복자를 수행한 그리스의 역사가들은 이 도시를 '부유하고 번영하는 또 잘 통치되는 곳'으로 기술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지 10년이 못 되어 탁실라는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세운 마우리아 제국에 합병되어 그의 지배 기간 중 지방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서쪽에서 온 정복자들에게 지배되어온 탁실라의 역사에서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았다. 3세대에 걸친 마우리아 통치 후에 이 도시는 박트리아의 인도 그리스 왕국에 의해 합병되어 BC 1세기 초까지 인도 그리스 인의 통치를 받았다. 그 뒤를 이어 중앙아시아에서 온 사카 족 즉 스키타이 족과 파르티아 족이 AD 1세기 후반까지 이곳을 지배했다. 초기 그리스도교 전설에 의하면 파르티아 시대에 사도 토마가 탁실라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 외에 이곳을 다녀간 사람으로서 티아나의 신(新)피타고라스파 철인 아폴로니오스가 유명하다(AD 1세기). 그의 전기 작가 필로스트라토스는 탁실라가 대칭적 구도로 설계된 요새화된 도시이며 규모면에서는 니네베에 필적한다고 기술했다.

탁실라를 파르티아 족으로부터 빼앗은 것은 쿠줄라 카드피세스 지휘 하의 쿠샨 족이었다. 위대한 쿠샨 통치가 카니슈카는 이곳에 3번째 도시 시르수흐를 세웠다(2번째는 시르카프로서 인도 그리스 시대에 세워졌음). 4세기에 사산 왕조의 샤푸르 2세(310~379)가 탁실라를 정복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그곳에서 발견된 수많은 사산 왕조 동전이 입증해준다. 사산 왕조 지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동진의 법현이 대략 5세기 초에 이 도시에 왔을 때는 불교 성지와 사원이 융성한 곳이었다. 그 후 곧 훈 족에 의해 약탈당했고 이후로 다시는 재건되지 못했다. 당나라 현장(玄?)이 7세기에 이곳에 와서 도시가 폐허화되었음을 보았고, 그 후로는 이곳에 대한 언급이 없다. 발굴 작업은 인도 고고학의 아버지 알렉산더 커닝엄 경이 1863~64, 1872~73년에 시작했는데 사라이칼라로 알려진 현지의 유적 터가 고대 탁실라임을 확인했다. 그 후 존 마셜 경이 이 작업을 계속하여 20여 년 간 고대 유적 터와 그 곳의 기념물들을 모두 발굴해냈다.

고고학; 탁실라의 건축 유적에는 비르 토루(土壘) 지역, 시르카프의 궁궐 터, 잔디알과 피팔라 사원, 기리 요새, 모라모라두와 자울리안 사원, 다르마라지카?발라르?쿠날라 탑(고분) 등이 있다. 기념물에 사용된 여러 다른 유형의 석공술에서 각각 만들어진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가장 초기의 유적은 비르 토루의 유적들이다. 궁궐 터는 아시리아의 궁궐터와 동일한 유형으로 설계되어 몇몇 입구가 있고 그 외곽에는 성이 둘러 처져 있다. 가장 오래된 건물들은 잡석을 쌓아 만들었고, 그 후 계속해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그 곳에서는 거대한 불교 사원, 몇몇 작은 신전 및 구획으로 된 거주용 집들이 발견되었다. 2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상이 있는 신전은 돌출된 코린트 식 벽기둥이 앞면에 있고 중간 벽면에는 움푹 들어간 곳이 몇 개 있어서 흥미롭다. 그 밖에 테라코타와 도자기, 작은 청동기들, 구리와 철로 만든 물건들, 염주알, 보석, 인도-그리스?파르티아?초기 쿠샨 왕조의 동전 등 많은 골동품들도 발견되었다. 궁궐 터 내부의 구식 구조물과 남쪽 구역의 돌로 쌓은 성벽 사이의 단층 관계는 1944~45년에 영국의 고고학자 R.E. 모티머 휠러 경의 발굴에 의해 밝혀졌다.

치르 토페(Chir tope)로 잘 알려진 다르마라지카 유적은 지면을 주변보다 높여 바탕을 조성하고 지은 원형 구조물이다. 커다란 탑을 작은 기도실들이 둘러싸고 있다. 주탑(主塔) 주변의 건축물에는 뚜렷이 다른 3가지 양식의 석공술이 쓰인 점으로 보아 건물 건축 작업이 여러 시대에 걸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카로슈티의 은판(銀板)으로 두루마리 비문과 석가의 사리가 들어 있는 작은 금궤가 한 기도실에서 발견되었다. 비문에는 ‘위대한 왕이며 왕중의 왕, 하늘의 아들인 쿠샤나’(쿠샨의 정복자 쿠잘라의 아들인 비마 카드피세스인 듯함)에게 건강을 내리게 하려고 BC 136년에 노아차 시 출신의 우르사카라고 하는 한 박트리아 인이 사리를 사원에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유적 터에는 또한 부처와 보살의 여러 조각들도 있다.

인공 구릉 위에 세워진 잔디알 사원은 그리스의 고대 사원들과 매우 유사하다. 이 사원의 이오니아 식 원주와 돌출된 벽기둥은 거대한 사암(砂岩)으로 만들어졌다. 스키타이-파르티아 시대에 세워진 이 사원은 필로스트라토스가 <티아나의 아폴로니오스의 생애(Life of Apollonius of Tyana)>에서 언급한 사원일 것이다. 잔디알 사원은 불교 사원이 아니지만 절 하나와 두 군데의 탑 터가 발견된 자울리아 유적은 불교 유적이다.

탁실라는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학문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비하르의 날란다에 있는 것과 같은 강연장과 거주 지역을 갖춘 대학 도시는 아니었다. 탁실라에서 교사는 제자들을 유숙시켰고 그들은 하숙비를 스승과 가족에게 현금이나 용역의 형태로 지불했다. 불교 사원에서는 학생과 승려가 원하면 음식을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