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1963년작 스릴러 <새>에서 티피 헤드렌은 까마귀 떼가 공격하자 제일 먼저 핸드백을 지키려 한다. 이는 많은 여성들이 인정할 본능적인 제스처다. 핸드백은 단순한 액세서리라기에는 너무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 핸드백은 서바이벌 키트이자, 투자고, 귀중품이다. 실제적이고 실용적일 수도 있고, 사치품이며 경솔할 수도 있다. 대량 생산품일 수도, 수공품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상품물신주의의 끝판왕이자 소유물이 함축하는 지위의 상징물인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핸드백 하나 없이도 그럭저럭 산다. 그러나 패션이건 기능이건 간에 핸드백(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극도로 개인적인 것이다. 중세시기에 남자들은 옷섶에 지갑을 숨겼다. 여자들은 묵주, 기도서, 향낭, 단도 등 필요한 것들을 거들이라 불리는 벨트 형태의 끈에다 매달고 다녔다. 이후 여러 세기가 지나는 동안 거들이 주머니로 대체되고 끈으로 당겨 닫는 지갑(레티큘)으로 바뀌어갔다. 손에 들고 다니는 이 작은 지갑은 흔히 아름답게 수를 놓아 연인이나 친구 사이의 일상적인 선물로 주고 받았다.
19세기에는 레티큘과 손지갑, 토시 등과 같이 거들과는 다른 허리띠 모양의 섀털레인을 허리에 차고 소형의 아이템들을 걸었다. 이것은 장식적이면서도 기능적인 역할을 했다. 물건을 지니는 이러한 방식들은 여성의 세계가 가정사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적어도 상류층 여성은 들고 다닐 것이 별로 없었고, 멀리 가지 않았으며, 그런다 해도, 시종이나 짐꾼들이 늘 도움을 주었으리라 추정된다. 영국의 패션 역사학자 클레어 윌콕스는 19세기 후반 핸드백의 출현이 사회적인 변화를 나타냈다며, “여성들이 새로 찾은 자유와 독립을 상징한다”고 쓰고 있다. 내용물이 밖으로 보이는 섀털레인이 가정이라는 사적인 영역에서 쓸 수 있는 것이었다면, 핸드백은 공적인 영역에서 사용되었다. 공적인 영역에서는 여성들이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감춰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패션과 기능은 처음부터 경쟁을 하며 합쳐졌다. 20세기 초에는 큰 가방이나 어깨끈이 있는 서류가방이 현대적 여성임을 드러냈고, 일터에 참여한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그러나 곧 명품가방이 나타났다. 모든 옷에 핸드백을 코디하는 유행이 시작되자, 평범한 모로코나 키드스킨 가죽 외에 악어, 영양, 물개, 족제비 가죽이 새로운 유행 아이템으로 더해졌다. 밤에는 어여쁜 새틴이나 벨벳, 수를 놓거나 섬세한 메시 가방을 들었다. 1920년대 보석상들은 보석 장식으로 화려한 지갑을 만들었다.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루비, 사파이어, 진주가 박힌 까르띠에 지갑이 한 예다.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이용되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크롬과 베이클라이트(합성수지), 투명한 루사이트 등도 한때 유행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인들이 들고 다닌 방독면 가방이 멋있다고 생각되어 중성적인 멋을 풍기며 사용되었다. 1950년대에는 핸드백이 진지해졌다. 이때는 유명 디자이너들의 개별 핸드백 디자인이 나와서 패셔너블하고 문화적인 의미를 갖는 시기였다. 샤넬이 만든 누빔 골드체인 ‘2.55’(55년 2월 출시일에서 딴 이름)백, 루이뷔통의 이니셜이 새겨진 ‘버킷백’(원래는 샴페인버킷), 에르메스의 ‘켈리’(물론 그레이스 켈리에서 딴 이름이다), 구찌의 대나무 손잡이백은 지금도 베스트셀러다.
그 무렵 이런 명품백들은 평범한 여성들이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패션 잡지들은 여성들이 가능한 한 최고로 좋은 것을 사도록 부추겼다. 윌콕스에 의하면 핸드백이야말로 훌륭한 몸단장의 표시로 그것이 열려있거나 닫혔거나 진정 숨길 수 없는 지표였다. 핸드백이 한 여성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개념을 이용해 호주의 글로메시(Glomesh)라는 회사가 명사들을 초대해 자신들의 글로메시백의 내용물을 드러내 보이게 하는 잊을 수 없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그 핸드백은 이제 한 바퀴 돌아 모든 것이 전시 중이다. 조지아 시대의 화려하고 럭셔리한 대표작에 이어 민족적 정서가 담긴 패치워크가 새겨진 견고한 가죽 가방이 유행이 된 적이 있다. 이러한 가방은 다문화주의, 반물질주의, 노동자 계급의 착용자들에게 어울렸으며, 페미니즘의 안티패션과 연결되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고, 종종 정치적 참여와 개인 역량 강화와의 사이에서 경쟁하는 페미니즘은 패션 그리고 핸드백의 세계에 맞닥뜨렸다. 그리고 후자는 언제나 승리했다. 1980년대에는 마가렛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이 풍조, 파워, 돈, 이성에 영향을 미치며 군림했다. 핸드백은 정체성을 띠게 됐다. 그리고 톰 포드가 “갖게 되거나 혹은 죽거나 둘 중 하나”라고 정의했던 ‘잇 백’의 시대가 왔다. <가방: 스타일의 어휘>의 저자에 따르면, 업계에 트렌드 가방으로 알려진 이 가방들은 오뜨꾸뛰르 브랜드들을 벼랑에서 구제하며, 주요 패션 이미지(와 재정)의 중심이 되었다.
에르메스 버킨백 같은 상징적인 가방들의 대기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모조품은 품질이 더 좋아지고 있다. 2008년까지만 해도 가짜가 너무 만연해서 루이뷔통은 브룩클린 박물관 밖에 후드티를 입은 길거리 장사꾼들이 있는 모조 가방 마켓을 세팅해서 부유한 소비자들에게 진짜 가방을 실제 가격에 팔기도 했다. 불법을 흉내 내면서 일부러 그랬을 정도다. 지난 해 세일즈 어시스턴트가 오프라 윈프리를 알아보지 못한 사건이 있었을 때 3만 8천 달러(4천100만원) 가격의 핸드백이 전 세계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핸드백 업계에서 화제가 됐었다. ‘더 비즈니스 오브 패션’ 매거진은 ‘핸드백 전쟁’이라는 표현이 가능한 중국에서는 핸드백의 산업 가치가 수십억에 달한다고 적고 있다. 중국에서는 줄기차게 오르던 핸드백의 매출 증가가 부패관리들에게 고급 선물을 주는 행위 단속으로 정체된 듯하다. 그러나 홍콩에서는 여전히 디자이너 핸드백이 오가고 있으며 매출은 증대되고 있다. 한편, 어느 화려한 잡지든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코치, 베르사체, 루이뷔통, 구찌, 샤넬 등 무수한 브랜드의 광고와 함께 핸드백이 패권을 장악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델과 디자이너 의상은 거의 부수적이다. 밀레니얼 시대에는 주체와 대상 간의 관계가 흐트러졌고, 입는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핸드백이다. 우리는 배경으로 밀려나 단순한 액세서리가 된 느낌이다. 카렌 드 페르튀 기자 webmaster@epochtime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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